레코드숍에서 음반을 구경하다 보면 조금 이상한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레코드는 우리가 흔히 LP라고 부르는 커다란 12인치 크기인데, 그 옆에는 손에 쏙 들어오는 7인치 레코드가 있습니다. 가끔은 그 둘의 중간쯤 되는 10인치도 보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합니다.
큰 판에는 음악이 많이 들어가고 작은 판에는 적게 들어가는 것 아닐까?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7인치와 12인치가 서로 다른 음악 문화와 연결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12인치는 앨범을 듣는 방식과 가까워졌고, 7인치는 오랫동안 한 곡을 사고 듣는 방식과 연결됐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 클럽에서는 다시 커다란 12인치 레코드에 한두 곡만 넣는 일이 벌어집니다.
굳이 큰 판에 적은 곡을 넣었습니다.
레코드의 크기는 단순히 물건의 크기가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음악을 어떻게 담고 어떻게 들었는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7인치와 12인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LP가 등장하기 전에도 원판 형태의 레코드는 존재했습니다.
20세기 전반에 널리 사용된 셸락 레코드 가운데는 10인치와 12인치 규격이 있었고, 흔히 약 78 RPM으로 재생되는 음반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한 면에 담을 수 있는 시간이 지금의 LP보다 짧았습니다.
그래서 긴 작품을 하나의 음반으로 판매하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여러 장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여러 장의 레코드를 책처럼 생긴 묶음에 넣어 판매하는 방식도 사용됐는데, 우리가 지금 여러 곡을 하나로 묶은 작품을 앨범(album)이라고 부르는 역사와도 연결되는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그러던 1948년, Columbia Records가 33⅓ RPM의 마이크로그루브 LP를 상업적으로 선보입니다.
더 미세한 홈을 사용하고 느린 속도로 재생하면서 기존 레코드보다 훨씬 긴 음악을 한 면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12인치 LP는 특히 긴 작품이나 여러 곡을 하나로 묶는 데 유리했습니다.
여기서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12인치 + 33⅓ RPM + LP
라는 조합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경쟁사였던 RCA Victor는 다른 방향을 택했습니다.
7인치 45 RPM은 ‘한 곡을 듣는 레코드’의 상징이 되었다
1949년 RCA Victor는 7인치 45 RPM 레코드를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Columbia의 33⅓ RPM LP와는 꽤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크기는 작았고 회전 속도는 더 빨랐습니다. 초기에는 두 회사의 서로 다른 레코드 시스템이 경쟁하면서 이른바 ‘War of the Speeds’라고 불리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결국 어느 하나만 살아남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용도가 자리 잡았습니다.
12인치 33⅓ RPM LP는 여러 곡이나 긴 작품을 담는 앨범에 적합했고, 7인치 45 RPM은 비교적 짧은 대중음악 한두 곡을 담는 싱글에 널리 사용됐습니다.
이 차이는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줍니다.
앨범 전체가 필요하지 않아도 좋아하는 노래 한 곡이 담긴 45 싱글을 살 수 있었습니다. 주크박스에 들어가는 음반으로도 45가 중요한 역할을 했고, 라디오를 통해 히트한 노래를 음반으로 구입하는 대중음악 시장과도 잘 맞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오래된 팝과 록, 소울 음반을 찾아보다 보면 작은 7인치 싱글을 아주 많이 만나게 됩니다.
한쪽에는 대표곡이 있고 다른 쪽에는 또 다른 곡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지금도 사용하는 A-side와 B-side라는 개념도 중요해집니다.
이건 나중에 따로 한 편을 쓸 이유가 충분합니다.
7인치 레코드의 가운데 구멍은 왜 이렇게 클까?
7인치 45 RPM 레코드를 처음 보면 크기 말고도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다.
가운데 구멍입니다.
12인치 LP의 작은 스핀들 구멍과 달리, 미국에서 널리 사용된 많은 7인치 45 레코드에는 상당히 큰 센터홀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단순한 장식이 아닙니다.
RCA의 45 시스템은 처음부터 기존 78이나 Columbia LP와 다른 형태의 자동 재생 시스템을 염두에 두고 설계됐고, 큰 센터홀은 그러한 45 RPM 포맷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후 주크박스 등에서도 이 형태가 널리 사용됐습니다.
다만 모든 7인치 레코드의 구멍이 큰 것은 아닙니다.
지역과 제작 방식에 따라 작은 센터홀을 가진 7인치도 있고, 가운데 부분을 필요에 따라 제거할 수 있도록 만든 이른바 push-out centre 형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큰 센터홀을 가진 7인치를 일반적인 작은 스핀들의 턴테이블에서 재생할 때는 가운데를 맞춰주는 45 RPM 어댑터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레코드숍에서 가끔 보이는 작고 동그란 부품이 괜히 생긴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10인치는 어디로 갔을까?
7인치와 12인치는 지금도 비교적 익숙하지만 10인치는 조금 애매한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10인치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 실험적인 규격은 아닙니다.
앞서 이야기한 78 RPM 시대에도 10인치 레코드는 널리 사용됐고, LP가 등장한 초기에도 10인치 LP가 제작됐습니다.
특히 대중음악 앨범 가운데 10인치 LP로 발매된 음반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긴 재생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12인치 LP가 앨범의 대표적인 규격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결국 10인치는 7인치 싱글과 12인치 LP 사이에서 주류 규격으로서의 위치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없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EP, 특별판, 한정판, 재발매 음반 등에서 10인치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고 레코드를 구경하다가 10인치가 나타난다면 크기를 잘못 자른 LP는 아닙니다.
원래 있는 규격입니다.
조금 덜 자주 만날 뿐입니다.
그런데 왜 12인치에 한 곡만 넣었을까?
여기서 레코드 크기 이야기가 다시 재미있어집니다.
12인치가 긴 앨범을 담기 좋았다면 당연히 최대한 많은 음악을 넣는 편이 효율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1970년대의 디스코와 DJ 문화에서는 반대의 일이 중요해졌습니다.
12인치 싱글입니다.
커다란 12인치 레코드에 한 면당 한 곡이나 비교적 적은 수의 곡을 담는 방식이 등장했습니다.
왜 이렇게 아까운 짓을 했을까요?
레코드에서는 사용할 수 있는 면적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소리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 면에 너무 긴 음악을 넣어야 하면 제한된 공간에 홈을 더 촘촘하게 배치해야 합니다. 반대로 적은 음악을 넓은 면적에 담으면 커팅 엔지니어가 홈 간격과 레벨을 다루는 데 더 많은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특히 클럽에서는 강한 저역과 충분한 재생 레벨이 중요했습니다.
커다란 사운드 시스템에서 DJ가 음악을 틀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12인치라는 넓은 면적을 한두 곡에 사용하면 이러한 목적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디스코에서는 일반적인 라디오용 싱글보다 긴 버전이 필요했습니다.
DJ가 곡과 곡을 이어가고 사람들이 춤추는 흐름을 유지하려면 짧은 싱글보다 긴 인트로와 브레이크, 연장된 리듬 구간이 유용했습니다.
그래서 extended mix와 12인치 싱글이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12인치 싱글은 이후 디스코뿐 아니라 댄스 음악과 DJ 문화에서 중요한 포맷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똑같은 12인치라도 하나는 앨범 전체를 담기 위해 사용되고, 다른 하나는 한 곡을 더 넉넉하게 담기 위해 사용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레코드는 크기만 보고 정체를 판단하기 어려운 물건입니다.
크기가 크면 무조건 음질이 좋을까?
여기까지 읽으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럼 큰 레코드가 소리도 무조건 좋은 것 아닌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레코드의 재생 결과에는 크기뿐 아니라 회전 속도, 한 면의 재생 시간, 홈 간격, 커팅 레벨, 마스터링, 프레싱 상태 등이 함께 영향을 줍니다.
예를 들어 12인치 45 RPM 음반은 넓은 면적과 빠른 회전 속도를 활용해 음질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12인치 45 RPM이라는 글자만으로 좋은 음질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33⅓ RPM LP라고 해서 음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크기는 여러 조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7인치 < 10인치 < 12인치 순으로 음질이 좋아진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레코드가 그렇게 친절한 물건은 아닙니다.
크기와 RPM, 싱글과 LP를 한꺼번에 외우지 말자
레코드를 처음 알아갈 때 가장 많이 헷갈리는 이유는 서로 다른 기준을 하나로 묶어 외우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만 분리하면 상당히 쉬워집니다.
7인치·10인치·12인치
→ 레코드의 물리적인 크기
33⅓ RPM·45 RPM·78 RPM
→ 레코드의 회전 속도
싱글·EP·LP
→ 음악을 담고 발매하는 포맷 또는 구성
역사적으로 자주 사용된 조합이 있기 때문에 서로 연관되어 보이는 것입니다.
가장 익숙한 예를 들면
7인치 + 45 RPM + 싱글
그리고
12인치 + 33⅓ RPM + LP
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절대적인 공식으로 생각하면 곧 예외를 만나게 됩니다.
12인치 45 RPM 싱글도 있고, 12인치 45 RPM으로 제작된 앨범도 있습니다. 7인치 EP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처음 보는 레코드를 재생할 때는 크기를 보고 RPM을 추측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라벨이나 재킷에 표시된 재생 속도를 확인하면 됩니다.
레코드가 친절하게 숫자를 써놓은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무리
7인치·10인치·12인치의 차이는 단순히 원판의 지름만 다른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10인치와 12인치 레코드가 사용되던 78 RPM 시대를 지나, 1948년 Columbia의 33⅓ RPM LP와 1949년 RCA Victor의 7인치 45 RPM이 등장하면서 레코드의 크기는 서로 다른 음악 소비 방식과 연결되기 시작했습니다.
7인치 45는 한 곡을 중심으로 한 싱글 문화와 가까워졌고, 12인치 33⅓ LP는 여러 곡을 하나의 작품으로 듣는 앨범 문화에 적합했습니다.
그리고 디스코와 DJ 문화에서는 다시 12인치라는 넓은 공간을 한 곡을 더 효과적으로 재생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같은 원판인데 시대와 목적에 따라 쓰임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된 레코드를 한 장 집어 들었을 때 크기만 보고 끝내지 말고 가운데 라벨도 한번 살펴보면 재미있습니다.
몇 RPM인지, 한 면에 몇 곡이 들어 있는지, 싱글인지 LP인지.
그 작은 정보들을 읽다 보면 그 레코드가 어떤 방식으로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만들어졌는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FAQ
Q. 7인치 레코드는 전부 45 RPM인가요?
아닙니다. 7인치 45 RPM 싱글이 매우 널리 사용되어 두 개념이 강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7인치는 크기이고 45 RPM은 회전 속도입니다. 다른 속도로 제작된 7인치 레코드도 존재하므로 실제 음반의 표시를 확인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Q. 왜 일부 7인치 레코드는 가운데 구멍이 큰가요?
큰 센터홀은 RCA가 선보인 45 RPM 포맷과 자동 재생 시스템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후 주크박스 등에서도 널리 사용됐습니다. 큰 구멍을 가진 7인치를 작은 스핀들의 턴테이블에서 재생할 때는 45 RPM 어댑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Q. 12인치 싱글과 12인치 LP는 어떻게 구별하나요?
크기만으로는 구별할 수 없습니다. 음반 라벨과 재킷에 표시된 수록곡, 재생 속도, 카탈로그 정보 등을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12인치 싱글은 한두 곡이나 여러 버전의 한 곡을 담는 경우가 많지만 이것 역시 절대적인 규칙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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